<2004년 10월 벼 그리기 모임 후>



풀무 세밀화 동아리인 시금치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이야기입니다.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시금치 후배들과 바다로 강으로 숲 속으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어요. 여름, 겨울 연수 때나 두 달에 한 번 정도 학기 중 모임도 같이 했었죠. 제가 생태관련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막 시작하던 때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시금치 첫 활동을 함께 시작하게 되었어요.


첫 연수는 추운 겨울 추위와 싸우며 밭에서 시금치 스케치를 했어요. 풀무 들어오는 입구 하우스 맞은편에 밭이 있잖아요? 감기 걸린 사람은 없었지만, 스케치 내내 추위에 떨어서인지 밤샘 채색 중에 앉은 채로 잠든 친구는 있었죠. 두 번째 겨울 연수는 강원도 산골짜기 강을 찾아 얼음을 깨고 빙어를 잡아 빙어를 그렸어요. 빙어를 잡기야 잡았지만 처음 잡아 보는 거라 몇 마리 잡지 못했는데 빙어는 날 걸로 초장에 찍어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먹다 보니 정작 그려야 할 빙어를 더 잡지 못해 돈을 주고 사오기도 했어요. 좀 많긴 했지만 그날 저녁은 빙어 튀김이 저녁 메뉴였죠. 여름엔 남해의 한 갯벌을 찾아 갯벌에 사는 조개들과 갯벌 속에 사는 ‘쏙’을 잡아 그리기도 했어요. 다들 고무장화를 신고 남해 갯벌을 누비는데 그 중 한 친구는 허벅지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오기도 했어요. 멀리서 보면 갯벌에 일하러 나온 사람처럼 보였을 거에요. 학기 중엔 학교 뒷산에 사는 들꽃을 그리기 위해 각자 숲 속에 자리를 잡고 그렸는데 조금 거짓말 덧붙여, 모두 숲 속에 녹아들어 어디서 그리고 있는지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죠!



그림을 그릴 때 분위기 있는 화실에서 수백 장의 자료집을 펼쳐놓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여유롭게 그리는 방법도 있지만, 직접 현장에 나가서 추위에 떨고, 더위에 지치고, 고생하며 느끼며 그리는 방법도 있다는 걸 배워가는 시간이었어요. 저야 이미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시금치 후배들에게 배우고 있었어요. 후배들은 저보다도 더 열정적이었거든요.


시금치가 만들어지게 된 동기는 세밀화 책을 만드는 한 출판사 기획자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어요. 원래 목적은 젊은 세밀화가를 발굴하기 위해 대상을 찾던 중 풀무를 알게 되었고 풀무에 오셔서 강의도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시금치가 만들어졌고 연수 일정 중엔 그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출판사를 찾아가 그림평도 듣고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다른 나라 세밀화도 봤어요.



그런데 출판사에선 왜 젊은 세밀화가를 미술전공인 대학도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찾으려 했던 것일까요? 그건 열일곱~열아홉이라는 지금 시기가 가장 섬세한 감성과 표현이 가능한 시기라고 해요. 고대 문명 중 돌을 깍아 만든 조각상들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세밀한 문양들을 작업한 사람들의 연령대가 나이 많은 장인이 아닌 여러분의 또래였다고 해요.


지금 시금치는 취미활동이지만 시금치를 통해 세밀화가의 꿈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대전일러스트협회 전시 중 세밀화 몇 점이 전시되었는데 그린 이는 대학에서 미술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경력이라곤 풀무에서 시금치 활동과 군 제대 후 일러스트 학원에서 몇 개월 그림을 그린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전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여러분도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가늠해 보는데 가장 섬세할 수 있던 시기에 직접 만지고 보고 느끼면서 세밀화를 시작했던 것이 유력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고 마술처럼 시금치만 나오면 다 이렇게 된다고 말 하는 건 아니겠죠? 분명 피나는 노력과 열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금치1기 권성현 세밀화<클릭>
그림1  그림2  그림3  그림4




저는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그림책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직업을 소개할 때 프리일러스트레이터 라고 말해요. 이름은 거창하지만 정작 계약이 없을 땐 바로 백수가 되어버리는 암울한 직업이죠. 제가 그동안 그린 그림은 생태에 관련된 그림, 바다에 사는 동식물이나, 곤충들 그리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다에서 일하는 어부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보통 프리랜서는 집이나 작업실에서 일합니다. 작업실의 경우 공동 작업실에서 같이 작업하는 경우도 있어요. 전 집에서 작업해요. 작은 옷 방을 조금 꾸며서 작업을 하고 있지요. 어느새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어요. 풀무 1학년 때 기숙사 방에 배 깔고 누워 십여 년 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할 것이라는 꿈을 꾸곤 했어요. 그런데 정말 이루어졌어요!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아침 일찍 출퇴근하는 직장인들보다 자유롭고 편해 보이는데, 수입이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어요. 책 한 권의 계약을 끝낼 때마다 또 다른 계약을 위해 노력해야죠. 마감에 쫓겨 집 밖으로 몇 날 며칠 나가지 못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반대로 계약이 없어 생활 유지가 어려워지면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꾸준한 작업을 유지할 수 있게 자기 관리와 노력이 필요해요.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하는 것이죠! 자기 스스로 정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작업 중인 책 이야기를 해볼게요. 오래전부터 취재하고 진행 중인 어부 이야기인데, 직접 어부 아저씨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 잡는 모습도 보고 잡아온 고기를 항구 경매장에서 파는 모습을 취재했어요. 처음 배를 탄다고 했을 때가 8년 전인데 ‘수영도 못하는데 바다에 빠지면 어쩌지!’하고 배를 탄다는 것에 대해 겁을 먹고 있었죠. ‘구명조끼를 하나 준비할까?’란 생각도 해봤어요. 정작 배를 타던 날엔 쑥스러워 얌전히 배 위에 올라탔어요. 배를 타고 1시간 반 넘게 바다로 나갔는데, 바다 위에 우리 배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먼바다에 나가면 파도가 거대한 융단처럼 움직이는데 파도의 폭이 어찌나 큰지 소인국 사람이 된 기분이었죠. 그 순간 바다에 빠지면 구명조끼고 뭐고 살아날 방법이 없겠구나 ...,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연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너무도 작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되니 무섭지가 않더라고요. 어부 아저씨들은 이런 바다에서 매일 고기를 잡으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죠. 구명조끼를 살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 제가 왠지 부끄러웠어요.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삶의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살림터에서,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곳을 찾아가지만 오히려 배우고 있어요.


올해는 어부 이야기가 완성 될 것 같아요. 8년이란 기간 동안 도중에 중단되기도 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작업이에요. 처음 어부 취재를 가던 시기가 시금치가 막 만들어 져서 함께 활동 하던 때이기도 해요. 책이 완성되면 학교 도서실에 기증할게요! 꼭 봐 주세요~


-2011년 1월 풀무지에 올린 글.



Posted by zerocat 트랙백 0 : 댓글 1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ddr | edit/del | reply _따라_ 2011.06.01 11:54 신고

    다들 못먹고 야윈듯한....ㅎ